“나라와”
아버지의 이름은 일용할 양식과 나라와 연결된다.
좋은 나라는 그 나라가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준다.
그리고 그 나라의 왕은 이로써 그 왕의 이름이 칭송을 받는다.
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강대한 나라
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
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
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어디가 아니라
바로 이 땅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이다.
이 땅에 분명히 실현할 것이기에 ‘이스라엘’에 하나님의 이름까지
새겨 넣으셨다.
이스라엘이 유리하고 방황하므로 아버지의 이름도 더럽힘을 받는다.
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
아버지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일하실 것이다.
그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실 것이다.
독수리가 지붕에 내려 앉았다.
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어디로 만든 것은 로마이다.
기독교를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.
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로 만들어 버렸다.
종교개혁은 이 틀을 벗어내지 못했다.
‘나라’ 개념은 숨겨지고 ‘피난구원’으로 종교적, 관념적이 되버렸다.
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.
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.
‘나라’라고 할 때 정치적 개념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.
그렇게 생각해야 한다.
교회 – 에클레시아 – 의회
이것도 정치적 개념이다.
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.
하나님 나라는 사실 절대군주의 나라이다.
세상역사의 절대군주가 모범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
우리의 생각이 잘 동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.
수건을 두르신 왕은 우리가 자발적인 순종으로 연합을 원하신다.
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자발적인 순종이 좋을 것이다.
나라에는 그 나라를 유지케 하는 법이 있다.
그 나라 법률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은 그 나라 백성의 도리이다.
‘피닌구원’은 결과만 생각한다.
구원받았으니 땡이다.
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자.
‘지키면’이라는 단서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.
‘은혜’와 ‘축복’이 있다.
은혜와 축복은 다르다.
은혜는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.
그러나 축복에는 꼭 단서가 있는데 ‘지키면’이다.
공감합니다.
나라 개념으로 성경전체를 다시 조명합니다.
모호하던 것이 갑자기 선명해집니다.
지금 이 순간이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.
하나님의 나라가 선명하게만 인식된다면, 현재의 삶도 선명하게 살고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.
지금, 이곳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삶.
이 삶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..
하나님의 나라가 선명하게만 인식된다면, 현재의 삶도 선명하게 살고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.
지금, 이곳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삶.
이 삶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..